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콤니노스 왕조 (문단 편집) === 두 번째 황제, 진정한 황실로 === 배출한 황제들이 실패를 거듭하였으나 여전히 강성했던 [[두카스 왕조|두카스 가문]]은 [[니키포로스 3세]]가 내쳤던 미하일 7세의 아들인 어린 콘스탄티노스 두카스[* 미하일 7세와 알라니아의 마리아 사이의 아들. 알렉시오스의 장녀인 안나 콤니니가 태어나자 약혼하였으나, 1094년 사망]를 통해 가문의 차기 제위를 보장해 줄 사람으로 사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택하였다. 결국 콤니노스-두카스의 연합 쿠데타로 니키포로스 3세가 퇴위하였고, 우여곡절 끝에 두카스 가의 여식이던 [[이리니 두케나]]를 알렉시오스와 함께 제위에 올림으로서 [[알렉시오스 1세]]가 즉위하였다(1081년). 알렉시오스는 효율적인 선택과 집중을 통해 외침[* 서방의 노르만, 북방의 페체네그, 동방의 투르크라는 엽기적인 3면 전선이었다(...)]과 경제문제 등의 과업을 해결하고 일족의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하는 족벌주의를 실시하여 정치적인 혼란을 줄여나갔다. 그리고 가문 최초의 [[포르피로게네투스|포르피로옌니티]]인 [[안나 콤네나|안나 콤니니]]를 시작으로 자식들을 유력자와 맺어주고 세 번째 자식이자 황자인 [[요안니스 2세]]가 태어나자 공동황제로 삼아 후계자로 점찍어 헝가리의 공주와 약혼시켰다. 후계의 왕조들의 선조이자 대를 잇는 황조의 성립이었다. 이후 알렉시오스는 실지 수복을 위해 [[교황]] [[우르바노 2세]]에게 원군을 요청했는데, 이는 어디선가 잘못 굴러가기 시작하여 [[십자군 원정]]이라는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돌아왔다. 그는 당황하였으나 영리하게 이를 이용하여 소아시아의 해안가와 서부 일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고 여력을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. 장기적인 배려는 부족하였으나 급한 불은 끈 알렉시오스는 치세 후기를 내부 안정에 쏟아부었다. 말년에 주변이 안정되자 [[아나톨리아]]로 진군, [[필로밀리온 전투]]에서 승리 하여 [[룸 술탄국]]을 밀어 붙였으나, 건강이 악화되어 장녀 안나의 희망과는 달리 그대로 [[요안니스 2세]]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1118년 사망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